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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천문학자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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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의 천문학자로 이 인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폴란드의 천문학자입니다. 지동설에 착안해 확신한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저서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전 4권)는 15251530년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태양계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태양계와 다릅니다.

비수아 강 근처의 토렌에서 태어났어요.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 바체로드 신부의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1491년 신부가 되기 위해 입학한 크라코프 대학교는 철학교수 브르제프스키로부터 수학과 천문학 강의를 들으면서 톨레미우주관(천동설)과 알폰소 항성 목록의 불일치를 알게 됩니다. 당시 천문학에서는 교회의 힘의 시정과 항해력의 개량이라는 두 가지 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율리우스력을 오래 사용해 달력에는 춘분 등 절기가 실제보다 10일 정도 늦어 제례일이나 계절에 맞지 않는 종교적 권위와 관련된 문제가 있습니다. 또 항해력의 문제는 원양 항해자들이 천문항법을 사용할 때 천동설(天動說)에 따라 계산한 천체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항해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코페르니쿠스는 1496년 외삼촌의 도움으로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볼로냐대에서 그리스어를 공부한 뒤 그리스 철학과 천문학을 공부했습니다. 또 1497년 3월 9일에는 황소자리 알파별 알드바란이 달에 가려지는 성식이 관측되기도 했습니다. 그해 조국 프라운버그 당평의원(당평)에 임명됐습니다. 1500년 로마의 크리스마스 행사에 참사 회원 자격으로 참가해 약 1년간 로마에 머물며 수학과 천문학에 관한 강연을 했습니다. 이듬해 귀국해 다시 이탈리아 유학 허가를 받고 파도바대에서 의학과 교회법을 공부한 뒤 1506년 두 가지 학위를 받고 귀국했습니다. 외삼촌은 귀국 후 본당 신부의 할스베르크에서 빈민들을 치료해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1512년 외삼촌이 세상을 뜨자 그는 그 뒤를 이어 프로엔보 성당의 신부로 취임했습니다. 이때부터 밤사이 지붕의 망성대에서 자체 제작한 각도측정기를 이용해 천체를 관측하기 시작했습니다. 관측은 정밀하지 않지만 이론가로서 태양 중심의 행성계 개념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1514년 교황청 공인 교리에 대한 천동설을 피하기 위해 교황청 수정심의 종교회의에 초청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습니다.이의제기. 1516년 엘랜드 교구 감사역 겸 아니카 소렌스탐 교회 평의원이 됐고 1520년 프로엔보르그 총교구장으로 자리를 옮겨 생을 마감했습니다. 지동설에 착안해 확신한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그의 저서 천체가 회전하는 데 관한 디 레볼루션bus orbium coelestium(전 4권)은 1525~1530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출판이 망설인 것은 종교적 이단자가 된 당시 상황을 감안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는 자비를 들여 '천체운동과 그 배열에 관한 주해'라는 논문을 출간해 일부 천문학자에게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 전달됐고, 1536년에는 신베르크 주교의 권고를 받아 책을 펴냈습니다. 그가 책 출간을 확정한 직접적인 동기는 독일의 젊은 수학자 지제이 레티쿠스의 조언이었습니다. 레티쿠스는 1539년 코페르니쿠스의 가르침을 1년 정도 직접 받고 출판사의 아이디어를 간청했습니다. 원고들이 레티쿠스를 거쳐 1542년 세계 최초의 뉘른베르크 활판 인쇄소로 넘겨진 이 책의 인쇄 샘플은 코페르니쿠스의 임종을 맞은 이듬해 5월 24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동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태양계의 모습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태양계와 다르다는 것입니다(그는 행성의 궤도를 둥글게 보고 운동의 불규칙성을 설명하기 위해 회전원을 사용했습니다)와 지구의 공전과 자전의 증거는 하나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