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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치가인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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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치가인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러시아 정치인으로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초대 대통령(1990.3~1991.1225 연임)을 역임했습니다. 개혁 추진은 소련 내의 개혁과 개방뿐 아니라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등 세계 질서에 대변혁을 가져왔습니다. 1990년 노벨평화상 수상, 1991년 공산당 해체로 소련 공산통치사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는 코카서스 산맥 북쪽의 스타브로폴 지방 프리부레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콤바인을 몰고 5년간 농장에서 일하다가 19세 때인 1950년 모스크바대 로스쿨에 입학해 2학년인 1952년 공산당에 입당해 교내 콤바인(공산주의청년동맹) 조직원으로 활동했습니다. 5년간의 대학 과정을 마치고 1955년 고향인 스타브로폴로 돌아와 연합당 서기, 1968년 지구당 제1비서, 197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이 됐습니다. 1978년 농업담당 당서기에 취임한 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대통령의 지원으로 대규모 농업투자 정책을 수행했습니다. 1980년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돼 권력 핵심권에 근접했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집권하면서 후계자로 지명됐고, 콘스탄틴 체르넨코 집권 기간에도 2인자 자리를 굳혔습니다. 1985년 3월 체르넨코 사망 후 당서기로 선출돼 개혁을 추진하면서 소련 내 개혁과 개방은 물론 동유럽 민주화 개혁 등 세계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988년 연방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을 겸직하다가 1990년 3월 소련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그해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1991년 7월 소련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계급투쟁을 포기하는 새로운 강령을 제정했습니다. 이런 개혁 의지는 1991년 8월 보수 강경파의 쿠데타로 한때 실각했으나 쿠데타 실패 사흘 만에 복권돼 공산당을 해체하고 소련 70년 공산통치사에서 종식됐습니다. 그러나 보리스 옐친 등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가연합이 탄생한 1991년 12월 25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사임 후인 1992년 국제환경보호운동과 전쟁난민 아동구호사업 등을 목적으로 한 고르바초프 재단을 설립했고, 1993년 4월 설립된 국제환경비정부기구(NGO) '그린 크로스 인터내셔널'의 초대 총장을 맡았습니다. 이후 환경운동에 앞장서 2007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45명의 환경영웅' 중 한 명으로 선정됐고, 2008년 2011년 러시아 총선을 목표로 정계 복귀를 선언했습니다. 1991년 한-소련 수교 기념식 참석차 방한한 그는 2001년 11월 동아일보사와 인촌기념회 초청으로 방한해 고려대에서 세계정세와 한반도의 미래를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습니다. 2008년 9월 녹색교차국제의장으로 환경재단 기후변화센터와 세계사이버대학 초청으로 방한한 그는 '러시아에서 투발루-기후변화와 인류의 미래로'를 주제로 강연했습니다.